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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절과 예법

대무신왕의 부여 원정기

by 헤스티아 ™ 2008. 9. 26.

대무신왕(大武神王)은   고구려 3대 국왕이며  대해주류왕(大解朱留王)이라고도 하였다.


유리왕이 재위 33년 갑술(서기 14)11세의 나이로 태자에 오른 후,유리왕이 재위 37년에 죽자 불과 1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의하면 어린나이에, 동부여와의 외교분쟁에 나서는가 하면 역사적인 학반령 전투를 이끈 신묘한 인물로 묘사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장자가 병사로 이른 나이에 죽고, 차자마저 외교분쟁등에 휘말려 자결을 하였기 때문에, 유리왕으로서는 대무신왕의 왕위계승을 극대화 하기 위해 신화적 장치를 덧입혓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무튼 유리왕의 역사이면에 감추어진 노력이 있었다고 하여도, 어린나이에 그 모든 것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대단히 영리한 왕이었음에는 분명해 보인다.  동부여와 고구려가 국운을 건 대 혈전을 펼쳤던 학반령 전투 당시 대무신왕이 나이는 겨우 열살, 그는 어릴 때 부터 전쟁터를 경험하였고, 그것은 아버지인 유리왕의 자식교육 방식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대무신왕이 할일은 분명하였다. 그의 할아버지이며 고구려 초대 왕이었던 추모성왕을 피박한 나라, 선왕대에 두차례나 대 공격을 해 왔던 나라, 바로 동부여에 대한 원정을 단행하는 것이었다.


대무신왕은 이 원정을 시행하기 앞서 5년동안 착실히 내정을 다스렸다. 재위 2년
가을 9월에 왕은 골구천(骨句川)에서 사냥하다가 신마(神馬)를 얻어 거루라고 이름하였다는 기록은 결코 우연히 아니다.


당시 사냥은 곧 군사훈련을 뜻하는 것이다. 또 사냥터에서 신마를 얻었다고 하는 것은 대규모 원정을 거행하기 위해, 이미 말 혹은 기마대를 양성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재위 4년, 왕이 성인이 되던 서기 21년에 동부여에 대한 원정을 단행하였다. 그런데  원정도중 또 한가지 기이한 일이 발생하였다. 바로 비류수가의 어떤 여인에게서 솥을 얻어 밥을 짓게 하니 불을 피우지 않고도 스스로 열이 나서, 밥을 지을 수 있게 되어 군사들이 배불리 먹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 그 솥 임자가 나타나 솥을 가지고 왕을 따르게 해달라는 부탁을 하자 왕은 그에게 부정(負鼎)씨의 성을 내려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대에서 鼎은, 솥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왕권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즉 신하가 균형있게 왕을 보좌해야 왕권이 바로 서 백성들을 윤택하게 할 수 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일이 성인이 되던 해 일어났다는 것 역시, 왕권이 안정되고, 대규모 원정을 단행할 만큼 군량미가 비축되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또 이물림(利勿林)이라는 곳에서  금도장과 병기 등을 얻었다는 대목 역시 대무신왕의 왕위계승을 정당화 시키고 동부여 원정의 필연성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였을 것이다 . 그리고 대무신왕은 그곳에서  9척장신의 북명(北溟) 출신  괴유(怪由)를 만났다. 괴유는 왕 앞에서 부여왕의 머리를 베어 오겠다고 호언하자, 그를 장군으로 삼았다. 또 적곡(赤谷) 출신의 마로(麻盧)가 긴창으로 길을 안내하겠다고 하자 역시 부하로 삼았다. 
 
그러나 이것역시 우연은 아니다. 대무신왕이 처음 부여를 공략할 때는 재위4년 12월이지만, 본격적으로 원정에 나선 것은 봄이 시작되는 다음해 2월이었다. 따라서 괴유와 마로 장군은 부여와의 크고 작은 전쟁에서 공로가 있었기 때문에 장수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대무신왕 재위 5년(서기 22) 봄 2월에 왕은  부여국 남쪽으로 진군하기 시작하였다. 그 땅은 진흙이 많았으므로 왕은 평지를 골라 군영을 만들고 안장을 풀고 병졸을 쉬게 하였는데, 두려워하는 태도가 없었다.


부여왕은 온 나라를 동원하여 출전해서 고구려가 진영을 갖추지 못한 틈을 타 기습작전을 전개하였지만, 진흙 구덩이에 빠져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었다. 즉 북쪽땅이 본격적으로 해빙기가 시작되어 그만큼 진흙 구덩이가 많았는데, 부여의 대소왕은 성급하게 군대를 움직여 스스로 함정에 빠지고 만 것이다.

그러자 대무신왕은 천하의 장사였던 괴유에게 총 공격 명령을 내렸다. 이에 괴유가 칼을 빼서 소리지르며 공격하니 부여의 모든 군대가 무너져서 지탱할 수 없었다. 괴유는 곧바로 전진하여 부여왕을 붙잡아 머리를 베었다. 그리고 전쟁은 곧 끝날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대무신왕의 승리에 대한 기쁨도 잠시 뿐이었다. 

부여군은 왕을 잃어 기력이 꺾였으나, 스스로 굴복하지 않고 고구려군을 여러 겹 포위하여 버린 것이다. 곳곳에 진흙 구덩이가 형성되어 있어 쉽사리 움직일 수도 없음은 고구려 군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섯불리 움직였다간 대소왕과 같은 운명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더구나 군량미마저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바로 앞의 사람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의 안개가 7일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대무신왕으로서는 빠져 나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은 것이다. 왕은 풀로  허수아비를 만들고 무기를 쥐여 군영의 안팎에 세워 거짓 군사들로 만들어 놓고, 사잇길을 따라 군사들을 숨기며 밤을 타서 어렵사리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급하게 탈출하였기 때문에 골구천의 신비로운 말과 비류원(沸流源)의 큰 솥을 잃었다. 이물림에 이르러 군사들이 굶주려 일어나지 못하므로, 들짐승을 잡아서 먹을 형편이었다. 전투에서는 승리하였지만, 결과적으로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는 전쟁이었다.

따라서 왕은 서울에 이르러 여러 신하를 모아 잔치를 베풀며 말하였다. “내가 덕이 없어서 경솔하게 부여를 정벌하여, 비록 그 왕은 죽였으나 그 나라를 멸하지 못하고, 또 우리 군사들과 물자를 많이 잃어버렸으니 이것은 나의 잘못이다.” 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대무신왕은 친히 죽은 자의 집을 방문하여 조상하고 , 백성을 위로하여 민심을 수습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고구려 사람역시 왕의 덕에 감동하여 모두가 자진하여 나라일에 몸을 바치게 되었다.

대무신왕의 부여원정은 실패한 원정이었지만 대소왕을 참살시켰기 때문에 승리한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이후 동부여는 왕의 부재로 극심한 혼란을 겪었으며, 끝내 예전의 국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사실상 고구려의 속국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하지만 대무신왕의 진정한 위대함은 대소왕을 참수한 것에 자만하지 않고,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위우치고 백성에게 다가갔다는 점이다.


통치자와 피통치자들의 신뢰형성, 그것은 국가를 경영하는데 있어 예나 지금이나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것이다.


대무신왕은 승리 지상주의에 빠지지 않고, 부여의 대소왕을 참살시켰음에도 전쟁을 완수하지 못하고 많은 희생자를 낸체 퇴각한 책임을 통감하고, 백성보다 낮은 자세로 다가가 전사자의 집을 직접 방문하여 조문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대무신왕의 이같은 통치이념과 자세가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는 초기의 어려움을 딛고, 그야말로 너나 할 것 없이 하나된 고구려인이 되어 그 어떠한 적과 맞서도 이길 수 있었던 강대국으로 성장시켰던 것이다

[출처] 대무신왕의 부여 원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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