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절과 예법

고구려 대무신왕

헤스티아 ™ 2008. 9. 26. 01:01

등극전후

 

대무신왕은 유리명왕의 셋째 아들로 다물후 송양의 딸 송씨의 소생이다. 당시 유리명왕은 아들이 6명이나 있었으나, 첫째인 도절은 유리명왕과 갈등을 빚어 자살하였고, 둘째인 해명은 황룡국왕이 선물한 활을 부러뜨린 일로 자살하였다. 그리하여 셋째인 무휼이 왕위를 이어받게 된다.

 

어렸을 때부터 신동으로 불릴 만큼 총명했던 대무신왕은 불과 10살이 되던 해인 서기 13년 11월에 동부여의 침략으로부터 고구려를 지켜냈다고 한다. 이때 무휼은 적군을 산골 깊숙이 끌어들여 골짜기에 그들을 가두어놓고 기습전을 펼치는 계책을 내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듬해인 서기 14년 11살 되던 해에는 태자에 책봉되어 유리명왕을 대신하여 국정에 관한 일을 도맡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4년 뒤인 서기 18년 10월에 서거한 유리명왕의 뒤를 이어 15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다.

 

동부여와의 전쟁

 

대무신왕이 왕위에 올랐을 무렵 중국 대륙에서는 민란이 한창 일어나고 있었다. 신나라 정권에 실망한 백성들이 참다못해 일제히 반기를 든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산둥 지방의 번숭이 일으킨 적미의 난과 녹림산에서 왕광과 왕봉이 일으킨 녹림의 난이었다.

 

이러한 혼란기를 틈타 대무신왕은 대대적인 팽창정책을 실시했다. 한나라의 붕괴와 한나라를 멸망시킨 신나라의 몰락은 곧 북방의 맹주를 자처하던 고구려와 부여에게는 영토 확장의 기회였던 것이다.

서기 20년 10월, 동부여의 대소왕은 대무신왕에게 몸은 둘인데 머리는 하나인 붉은 까마귀를 보내며 사신을 통해 “까마귀는 검은 법인데 이제 빛이 변하여 붉게 되었고, 또한 머리는 하나인데 몸이 둘이니, 이는 두 나라가 병합될 징조이다.”라고 전하며, 고구려를 합병시키겠다는 노골적인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에 대무신왕은 “검은색은 북방의 색인데, 이제 변하여 남방의 색이 되었다. 또한 붉은 까마귀는 상서로운 것으로 그대가 이것을 얻었으나 가지지 못하고 내게 보냈으니 양국의 존망은 알 길이 없도다.”라며 까마귀에 대한 해석을 달리하여 대소왕에게 전하였다. 사신을 통해 이러한 해석을 전해 들은 대소왕은 곧 후회하였다고 한다. 서기 21년 12월 대무신왕은 오랜 준비 끝에 부여 정벌을 감행하였으며, 이듬해 2월 9척 장신의 고구려의 장수인 괴유가 대소왕을 죽였다.

 

왕의 전사 소식에 동부여는 발칵 뒤집혀졌다. 백성들은 모두들 두려움에 떨었으며, 왕위 다툼에서 밀려난 대소의 막내 동생은 부여를 탈출하여 압록곡 부근에 갈사부여를 세웠다. 또한 그해 7월에는 대소왕의 사촌동생이 백성 1만여 명을 데리고 고구려에 귀순하였다.

 

한나라와의 전쟁

 

이 무렵 중국 대륙에서는 한나라 왕조의 후예인 유연과 유수 형제가 한나라 재건을 기치로 내세우고 신나라와 격돌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서기 23년에 마침내 왕망을 제거하였고, 2년 뒤인 서기 25년에 유연의 동생 유수가 등극하니 그가 바로 후한광무제다.

 

이처럼 중국 대륙이 급격한 변화를 겪는 동안 고구려는 내부적으로는 관제를 정비하고 바깥으로는 왕이 몸소 전장에 나서서 꾸준히 팽창정책을 지속하여 26년 10월 개마국을 복속시키고, 같은 해 12월에는 구다국을 복속시킨다.

 

28년 7월 한나라의 요동 태수가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했다. 한나라의 요동군이 위나암을 향해 진격해오자, 고구려는 수성전으로 맞섰다. 하지만 요동군은 위나암성을 에워싸고 장기전 태세를 갖추었으며, 이에 고구려군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때 좌보로 있던 을두지는 요동군이 암벽성인 위나암성 안의 물이 고갈되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연못에서 잉어를 잡아 적장에게 보냈다. 그러자 적장은 성 안에 물이 있으니 단시일 안에 점령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퇴각하였다.

 

낙랑정복과 말년

 

을두지의 계책 덕택에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한 고구려는 그 이후로도 계속 팽창정책을 실시하여 낙랑을 정복하였다. 낙랑 정복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은 대무신왕의 둘째 아들인 호동왕자였다. 호동왕자는 낙랑 정복을 위해 낙랑의 왕 최리의 딸과 결혼하면서까지 철저하게 정복야욕을 숨기기까지 했다. 그러나 호동왕자는 살아 생전에 낙랑을 정복하지 못하였다. 32년 대무신왕의 첫째 왕후의 계략에 걸린 그는 어머니를 간통했다는 누명을 받았으며, 결국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로부터 5년 후에 대무신왕은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낙랑을 정복하였다.

 

이에 후한에서는 옛 한사군 지역인 낙랑이 원래 자신들의 땅이었다고 주장하면서 고구려에게 반환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고구려가 이에 응하지 않자 후한은 44년에 바다를 통해 낙랑 지역에 병력을 투입하였고, 이에 밀린 고구려는 낙랑을 후한에게 뺏기고 만다. 이 사건 이후 살수 이남은 후한에 속하게 되었다.

 

44년 10월 대무신왕은 향년 41살의 나이에 서거하였다. 그의 첫째 아내는 모본왕의 어머니이며, 둘째 아내는 갈사왕의 손녀 해씨로 호동왕자의 어머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