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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금성대군, 서른 두 해의 생

헤스티아 ™ 2007. 8. 21. 13:24

금성대군은 조선 세종의 여섯번째 아들로 이름은 '유'다.

세종이 승하한 이후 유약한 문종이 왕위를 계승하였으나 문종마저도 일찍 세상을 하직한다. 다음 왕위를 계승할 사람은 문종의 아들이었던 단종. 그러나 단종은 왕위를 지키기에는 너무 어린나이었고 결국 수양대군(세조)에 의해 폐위되고 만다.

 

당시 세조의 동생이자 단종의 숙부인 금성대군은 외부세력과 함께 세조을 몰아내고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지만 계획이 발각되어 세조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된다. 이때 단종의 복위운동에 가담하여 죽임을 당한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를 일컬어 사육신이라 부른다. 금성대군은 단종을 복위하고자 하였다는 죄목으로 멀리 영주의 순흥으로 유배된다. 

유배된 금성대군은 위리안치라는 형에 처해지고 결국 순흥에서 사약을 받게되었다. 

 

위리안치는 죄인의 생활 반경을 제안하고 외부인의 출입을 금하기 위해 집 둘레에 가시나무로 울타리를 치는것으로 중한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 내려지는 형벌이었다. 경북 영주시 순흥면에는 당시의 금성대군이 세조에 의해 위리안치를 당한 곳이 있다. 사과나무밭 사이에 가시울타리가 있는데 이곳이 바로 그 역사의 현장인것이다.

 

 단종, 그리고 세조, 금성대군... 조선의 왕가에 피바람이 불어오는 시기였다. 금성대군 위리안치지에는 당시 유배되어가는 모습을 그린 안내판이 있다.

 

 낮은 돌 담장 위로 억센 가시나무가 울타리를 만들어 외부인의 방문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

 

 단촐한 초가지붕의 건물만이 가시 울타리안에 있을 뿐 다른 아무것도 없다. 지름은 넉넉잡아 50M는 되어 보인다. 무성한 풀들 사이로 한가닥 길만이 나 있을 뿐이다.

 

 설마 저 곳을 거주지 삼아 유배생활을 하였던 것일까... 그 적막감을 금성대군은 어떻게 감당하였을까.

 

 우물인 줄 알았다. 둥글게 만들어진 형태가 우물처럼만 느껴졌다. 하지만 이것은 중벌을 받고 사약을 기다리던 금성대군의 마지막 거쳐였던 것이다.

 

 사람의 흔적이 드물어 거미줄이 가득하다. 지금이야 역사적인 장소로 찾아보게되는 곳이지만 조선시대에는 두번다시 가고싶지 않은 생과 사의 전환점이 되는 곳이었으리라.

 

 깊다. 그리고 낮인데도 안이 어둡고 싸늘하다. 빛 한 줄기 들지않는 이곳에 유배된 금성대군은 이 안에서 사약을 받을때까지 외부와의 접촉없이 고독하게 죽음을 기다려야 했던것인가.

 

 우물 주변으로는 군사들이 포진되어 있어 외부에서의 접촉을 금했다고 한다. 또한 이 주변에 향나무를 심어 유배되어 온 죄인이 있음을 표시했다고 한다. 유배중에서는 가장 중한 형벌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위리안치였다.

 

 쓸쓸히 가시울타리에 둘러쌓여 서른두해의 생을 마감한 금성대군. 그가 추진하던 단종의 복위는 실패하였으나 후세에 이르러 단종에 관한 학예 연구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 반면 금성대군의 생은 작은 우물속에서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금성대군을 둘러싼 가시나무 울타리는 아직도 그 자리에서 매서운 가시를 돋아내며 외부인의 출입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금성대군 위리안치지. 무엇인가 볼꺼리를 찾아 간다면 실망하게 될 곳이지만 조선왕조의 역사를 되돌아보고자 한다면 꼭 한번 들러서 그 시대를 느껴보자. 명분에 의해, 그리고 야심에 의해 생을 살아간 이들의 모습은 역사에 남아있지만 그들의 생의 자취는 오늘날 우리에게 무언의 말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출처 : 다음 세상으로 들어가자
글쓴이 : joshua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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